제주도와 '추사 김정희'
link  여행자   2021-04-20
찾는 사람이 너무 많아 문제가 되고 있는 요즘과 달리 제주도는 한때 절해고도의 유배지이기도 했습니다.
제주도는 이익, 송시열 등 많은 사람이 유배를 왔었고 , 광해군도 제주에 유배되어 생을 마감했습니다.


제주에서 유배를 당했던 사람중에서도 널리 알려진 분은 추사 김정희 일 것입니다.
조선의 금석학파을 성립시키고 시서화에 능했던 김정희는 중국까지 널리 이름을 날렸지요.
곧잘 문자의 향과 책의 기운으로 표현되는 그의 글과 그림은 당대를 넘어 지금도 독보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1840년대 정쟁에 휘말려 제주도로 유배를 당한 김정희는 천에 고독의 나날을 버텼습니다.
제주도에서는 제주 관아가 있던 제주목이 아니라 비바람이 심한 서남쪽 대정현까지 왔습니다.


유배는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생이별을 뜻합니다. 그뿐 아니라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낮선 풍토에
몸과 마음이 버려졌으니 그 삶은 처절할 수 밖에 없겠지요.
그의 나이 55세, 날카로운 가시로 뒤덮힌 탱자나무 울타리를 두른 작은 초가에 위리안치된 추사는 회한과 그리움,
애절함으로 점철된 8년을 보냈습니다.


그사이 사랑하던 부인의 부음을 접합니다.
평소 병약하던 부인을 지극히 아끼던 추사로서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아닐 수 없었지요.
이렇게 모진 외로움 속에서도 그는 학문과 예술의 끈을 놓지 않고 추사체를 완성했다고 하니
그의 타고난 천재성에 끈질긴 집념이 더해진 결과라 할 수 있겠습니다.


말년에 고독한 삶을 보낸 추사였지만 수많은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중 이상적(우선) 은 스승과의 옛정을 잊지 않고 지극한 마음으로 그를 모셨지요.


시문에 능한 통역관이었던 이상적은 중국을 10여차례 왕래하면서 많은 책과 청나라의 금석문 자료를 스승에게
보냈고 스승의 글씨를 중국에 소개하였습니다.


그 당시 유배에 처한 죄인에게 소포를 배달하기가 쉽지 않았을 덴데, 그는 지난 세월의 스승과 제자 사이의 인연을
생각하며 스승을 충심으로 대하였습니다.
또 험한 바닷길을 마다하지 않고 두번씩이나 스승을 찾아 뵈기까지 하였지요.
유배지에서 제자를 만난 추사 김정희는 얼마나 가슴이 저렸을까요.
추사는 고마움을 그림으로 표현합니다.


지금은 국보 180호로 지정된 가 그것입니다.
단지 추사의 여러 그림중 하나로만 생각할 수 있지만, 가 그려진 내력을 설명한 발문에는 가슴속 저 밑에서
올라오는 뭉클한 절절함과 고마움이 배어 나옵니다.


작은 초옥을 중심으로 좌우로 서 있는 늙은 소나무와 잣나무가 전부인 그림은 황량함 그 자체입니다.
특히 가지끝에 솔잎 몇개만 달고 있는 메마르고 헐벗은 늙은 소나무는 당시 추사의 내면을 그대로 드러내는 듯합니다.


그런데 하고 많은 나무중에 하필 소나무와 잣나무를 그렸을까요?
라는 화제는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푸르름을 안다". 라는 공자의 말씀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소나무와 잣나무를 설명 할 때면, 그림과 발문 전체를 복사한 유인물을 나누어 줍니다.
개인의 영달을 최우선으로 앞세우는 요즘에 신의의 의미와 가치를 되새겨 보라는 은연중의 당부입니다.





식물에게 배우는 네 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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